최근에 "푸코의 진자"를 다시 읽었다. 2번째(혹은 3번째,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음) 읽는 것이긴 하지만, 또 봐도 아주 흥미진진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소설은 성당기사단을 다룬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지만, 그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풍부한 지식과 읽을거리들 때문에 더 재밌는 책이다.
이 책에는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영생불사"의 존재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한 말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어서 한 번 인용을 해볼까 한다.
"우리의 운명을 선망의 대상일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수 세기만 살아 봐라 그러면 치유 불가능한 권태가 불사의 운명을 타고난 비참한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세상은 단조롭기 그지 없고, 인간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오직 그전 세대의 오류와 악몽을 되풀이한다. 사건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것같이 모두 엇비슷하다... 신기한 일도 없고 놀라운 일도 없고, 새롭게 드러나는 일도 없다. 비로소 고백하거니와 우리에게 귀를 귀울이는 것은 홍해뿐이다. 이 영생불사가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 이 땅에 내가 캐내어야 할 비밀은 이제 없다. 인간에 대한 희망도 이제는 남은 것이 없다."
영생불사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의 꿈이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을 꿈꾼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영생불사의 존재가 있다면 또한 필연적으로 위의 글처럼 권태로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수십년간의 그 짧은 인생도 권태롭고 따분한 시간이 대부분인데, 수천년을 그렇게 산다면 처음엔 신기하고 놀라웠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루해지는 것이 당연하겠지. "치유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것은 정확할 것이다.
권태가 쌓이면 감정도 무뎌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어가는 것을 수천년간 본 후에도 사랑, 슬픔 등의 감정을 내부에 간직할 수 있을까. 자신이 죽지 않는데, 죽음이 숙명인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을까. 이미 수천년을 살았는데도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이 아름다울 것인가.
예전에 3X3 Eyes라는 만화에서도 불사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묘사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만화에서 삼지안족은 불로불사의 존재로 나오는데, 그 권태와 감정의 무뎌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기존의 인격을 죽이고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새로운 인격은 아기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권태를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감정또한 다시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또한 가끔 불사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루해도 좋으니까 말이다. 무슨 책에 나왔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절벽 한 가운데서 사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가는 지를 보고 싶을 뿐.
하지만 권태가 쌓이고 감정이 무뎌진다면.. 그 단순한 목표마저 내 안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다른 인간들과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일까.